영어권국가의 이해 B형, 헨리 8세(Henry VIII)의 종교개혁.hwp |
목차 영어권국가의 이해 B형, 헨리 8세(Henry VIII)와 종교개혁, 그 시작과 끝 목차 1, 종교개혁의 개요 2, 종교개혁의 전개과정 3, 헨리 8세 이후의 종교개혁 참고문헌 본문 1, 종교개혁의 개요 1532년,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과 회담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결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고자 했다. 즉시 잉글랜드의 도버로 돌아간 헨리는 앤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앤은 곧바로 임신하였고, 왕실 관습에 따라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렸다. 행사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1533년 5월 23일, 대법관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 합법성에 대한 결혼을 내리고자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법원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5일이 지난 1533년 5월 28일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이는 첫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물론이고 그녀의 친정 식구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캐서린의 아버지의 이름은 페란도 2세 엘 카톨리코로 아라곤의 왕이었으며 당시 스페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로스 1세는 그녀의 조카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엄격한 카톨릭 국가였으므로 그 결혼을 반대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헨리 8세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를 적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그는 영국 내 카톨릭 세력이 자신의 왕권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면 영국 종교개혁 (1533-1540)개혁이라는 과감한 수를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헨리 8세는 1534년 왕위 지상령으로써 잉글랜드교회를 치리하는 자는 왕임을 선포한다. 1534년 11월에 통과된 수장령은 잉글랜드교회의 수장은 군주임을 밝혔다. 동시에 영국 하원은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면 가차없이 형벌에 처하기로 결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의 동의 없이 교회가 어떤 규정도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 많은 성직자들은 국왕도 속인이라 보고 아무래도 속인이 교회 통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헨리 8세는 교황이 상징했던 권력이 머물 곳은 단 한 군데라고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잉글랜드교회의 상징적인 지도자는 영국 국왕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헨리는 수장령을 발표하여 그는 왕이 정당하고 적법하게 교회의 수장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마지막으로 헨리 8세와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에 처함과 동시에 대주교의 혼인무효 판결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앤과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익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대사를 잉글랜드에서 철수시킴에 따라 로마와 잉글랜드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하고 싶은 말 잘 활용하셔서 좋은 결과거두세요^^* 키워드 헨리, 종교개혁, 잉글랜드, 개혁, 종교, 영국 |
2018년 3월 29일 목요일
영어권국가의 이해 B형, 헨리 8세(Henry VIII)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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