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894년 그 날 - 동학농민운동 얼마 전 있던 박근혜와 최순실 사건에 대한민국은 촛불을 들고 일어섰다. 1894년 122년 전 그 날도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부패세력들과 권력에 맞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동학농민운동, 농민전쟁 혹은 농민혁명 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민중들은 왜 일어났던 것일까? 동학농민운동의 전, 후 상황과 부패세력의 파렴치함을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민비) 갑신정변을 계기로 민비와 민씨들은 더욱 똘똘 뭉쳐 권력을 독점했다. 이에 사람들은 "민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할 만큼 민가 일파의 세력이 장악되고 있었다. 그뿐이랴 민씨들은 벼슬을 팔아 내탕고를 채우며 사리사욕을 챙겼으며 궁궐은 날마다 잔치판이 벌려졌다. 그러던 중 민비세력에 위협적인 사태 변화가 생겼는데 1885년 8월 흥선대원군이 유폐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결국 민비는 내쫒아지며 흥선대원군에게 손을 내밀던 원세개는 고종을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고 공작하고 있었다. 민비는 이러한 정세에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뒤 노골적으로 접근하였다. 이에 질세라 일본, 미국이 고종과 민비에게 접근하였으며 동학농민운동 이전 10년 간은 러시아, 청나라, 일본 세 나라가 각축을 벌이는 시대였다. 오늘날 일본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맺으려 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눈치를 보는 상황과 별반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밖으로는 서로 다른 세력들이 우리나라를 주무르려 달려들고 안으로는 정치세력들의 수탈과 삼정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다른다. 이에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민중 봉기가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났으며 농민들은 수백, 수천 명이 떼를 지어 관아를 부수거나 심지어는 하급 관리자를 족치거나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역별로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났으며 하나로 뭉쳐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흡사 최순실 사건이 터졌을 때 각 지방에서 크고 작은 집회가 열린 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문제가 크게 번지면서 조정에서는 안핵사를 파견시켰다. 그러나 안핵사 또한 민중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보다는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우두머리를 죽이거나 귀향을 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을 달래주고 의지할 수 있었던 건 "동학"이였다. 동학은 학문이지만 종교였으며 사람들은 종교적 믿음보다 사회변혁을 꿈꾸며 이를 받아들였다. 동학이 그린 세상은 신분이 따로 나뉘지 않는 평등한 사회였으며 정치세력들에게 헐벗고 지친 민중들에게 "동학"은 한 줄기 빛이었다. 무능한 권력들은 동학의 교주 최제우의 목을 베어 꿈틀대는 변화의 싹을 베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동학의 가르침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정치세력들이 민중을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데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고 모든 사람을 하늘처럼 존중하는 시대가 열린다고 하니 그들을 안 믿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동학이 퍼지면서 변혁의 뜨거운 불길이 당겨질 불씨가 일어나고 있었다. 동학교도 최제우 그러던 1892년 말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의 수령들은 동학이 이곳을 중심으로 크게 번지자 "동학금령"을 발동하게 된다. 이에 서병학, 서인주 등이 교조의 신원을 건의했고 최시형도 이를 받아들여 전라도 삼례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라감사 이경식은 동학을 금지한 것은 조정에서 결정한 일이므로 함부로 바꿀 수 없다 하였고 충청감사 조병식 역시 전라감사와 똑같이 답하였다. 이 사건은 동학교도들이 최초로 벌인 집단행동이었으며 이를 교조신원운동 혹은 삼례집회라고 불리었다. 삼례집회에서 지방감사에게서 답을 얻지 못한 동학교단은 한성에 올라가 궁궐 앞에서 직접 왕에게 호소하기로 결정한다. 1893년 2월 10일 손병희, 김연국 등 40여명의 동학 간부들은 광화문에 엎드려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정식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구를 들어주지 않게 되고 결국 동학교단은 아무런 결과 없이 해산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동학교단이 해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13일 나라를 비난하는 방문이 곳곳에 붙었는데 그 내용은 3월7일에 한꺼번에 진격해 일본 세력과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일을 벌였겠는가? 이는 동학교도인 최시형이 이끄는 교단 세력이 아니라 전주를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 세력이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 안에는 순수한 종교 운동세력과 일반 민중이 품고 있는 반봉건, 반침략을 실현하려는 세력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상소 운동에 실패하자 최시형은 전국의 모든 동학교도들에게 보은 장내리에서 모이도록 명했다. 이렇게 장내리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속에는 동학교도들뿐만 아니라 불평불만에 가득 찬 민중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종교적 성격을 지녔지만 민중들이 이에 힘을 입어 반봉건, 반침략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지난 광화문 집회이후로 점차 나타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이 집회가 바로 보은집회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어윤중을 선무사로 내려 보냈는데 어윤중은 온갖 감언이설로 달래며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이에 하층부 교도들은 분노와 실망을 안은 채 저마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보은집회가 다시 맥없이 해산한 것은 주도 세력의 미지근하고도 투항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이를 보고 박근혜 정부가 사과랍시고 대국민 사과를 연설하고 하야하지 않겠다며 버티는 태세에 국민들이 광화문 집회를 하고도 맥없이 해산되거나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할까봐 두렵다. 한편 이 보은집회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눈이 이었는데 바로 전라도 금구 원평에 모였던 수만 명의 동학 농민군 이였다. 이 집회를 금구집회라 부르는데 이들은 보은집회와 결합하여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으나 보은집회의 실패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 좀 더 업그레이드하여 자료를 보완하여, 과제물을 꼼꼼하게 정성을 들어 작성했습니다. 위 자료 요약정리 잘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학업에 나날이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구입자 분의 앞날에 항상 무궁한 발전과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홧팅 키워드 농민, 세력, 집회, 운동, 민중, 사람 |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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