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1일 금요일

동학농민운동 2차봉기

동학농민운동 2차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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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차 동학농민 이후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을 피하고자 동학 농민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그리고 나서 청나라와 일본에게 병력을 조선 땅에서 물러가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조선과 농민군이 대립하는 것을 명분으로 장기적으로 조선에 머무르며 조선 침략이 꿈이었던 일본은 물러서지 않았다. 청나라 또한 톈진 조약 1884년 갑신정변 때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으로 조선에서 청과 일본 양국 군대가 동시 파병하고 동시 철수한다는 내용의 조약이다.
에 의해 일본과 마찬가지로 청군을 주둔 시켰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 내정을 함께 개혁하자고 제안하지만 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일본은 경복궁을 습격하였고, 조선에 친일 내각을 구성한다. 친일 정권은 '자주 독립(自主獨立)'을 선포하였고 조선은 청군의 철수에 대해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여기 말바꾸기) 이로 인해 전쟁의 명분이 생긴 일본은 한반도 내에서 청과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다.
농민군은 청.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내부의 개혁보다는 한반도에서 일본과 청나라의 군대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재봉기를 결정하게 된다.
농민군은 집강소 활동기간에 양곡과 무기 등의 확보가 이루어져 다양한 면에서 조건이 향상되어 있었다. 또한 1차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던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 지역에서 농민봉기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역사 문화재 연구소, 『동학농민전쟁 역사기행』, 여강, 1993, 21쪽.
그리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전봉준은 농민군과 함께 서울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전라도 삼례에서 출발한 전봉준과 농민군들은 논산에서 손병희와 농민군들과 함께 남북접 연합을 맺게 되었다. 농민군의 규모는 점점 커져 갔고 이 시기가 농민봉기의 절정기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 부대가 대전에서 충청도 감영군을 격파하고 공주로 향하던 중 10월 21일 충청도 목천 세성산에서 이무황이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기습당해 패한다. 10월 23일 이인에서 전투가 벌어져 경리청군(經理廳軍) 대관 윤영성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여 이인역(利仁驛)을 점령하고 승리하게 된다. 다음 날 새벽 봉황산을 포위한 뒤 효포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동학 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은 10월 23일 이인(利仁)전투를 비롯하여 10월 24일 대교(大橋)전투, 25일 효포와 능치전투, 11월 8일의 우금치 전투로 이어졌다. 조광한,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 살림터, 2014, 206쪽.
2차 봉기 때 각 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투쟁과 희생은 한국의 근대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농민들에 의한 반외세적 구국운동이자 역사를 한 단계 변혁. 도약시킨 큰 혁명이었다. 동학학회, 『동학운동인가 혁명인가』, 신서원, 2002, 34쪽.

하고 싶은 말
좀 더 업그레이드하여 자료를 보완하여,
과제물을 꼼꼼하게 정성을 들어 작성했습니다.

위 자료 요약정리 잘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학업에 나날이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구입자 분의 앞날에 항상 무궁한 발전과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홧팅

키워드
농민, 농민군, 일본, 조선, 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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